시간은 우리 존재의 핵심적인 차원이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중일까. 시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아인슈타인의 주장처럼 시간은 정말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977년 노벨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이 최근에 출판한 '확실성의 종말-시간,
카오스, 그리고 자연법칙'에서 해결하려는
핵심적인 의문이다. 프리고진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의
사상가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확실성의 추구를
전통으로 이어받은 고전과학과
현대과학에서 과거와 미래는 똑같은 역할을
한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은
물론이고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의
모든 사건은 '결정론적'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게 된다는 세계관은 결국 인간을
자연에 군림하는 '초자연적 존재'로
만들었고, 자연의 모든 다양성을 부정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우주는 '열적 죽음의
상태'에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을 낳았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그런 기계론적
자연법칙은 자연현상을 극도로 단순화하고
이상화함으로써 얻어진 것일 뿐임을
밝혔다. 平衡(평형)과 안정성은 자연에서
특별한 예외일 뿐이고, 오히려 비평형성과
불안정성, 그리고 搖動(요동)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평형과 안정성,요동,그리고 비가역성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고 한다.
프리고진이 제시하는 '복잡성의 과학'에서
자연은 불안정성과 요동으로 만들어지는
카오스 상태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출현하게 되지만, 어떤 질서가 나타나게 될
것인가는 오로지 확률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의 그런 진화론적
패턴은 관찰자인 인간의 정보 부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 존재하는 자연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주장이다. 복잡성의 과학의
핵심은 구성 요소에 대한 '개체적 설명'에서
벗어나서 '통계적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고진은 자연의 복잡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보다 온전한 물리법칙을
제시함으로써, 2천년전 고대 희랍시대부터
의문으로 남아있던 '시간 패러독스' 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방향성을
가진 공통적인 특성이다. 시간의
시작이라고 여겨지기도하는 우주의 '대폭발'은
영원한 시간의 진행 과정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뿐이고, 자연은 '자생적
조직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진화를
계속한다. 다만 대상에 따라 진화의 속도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자연의 온갖
다양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화살에 관한 그의 주장은
아직까지 학계의 보편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관한 본격적인
이론적 연구가 일부 성과를 거두고 있으나
대부분의 정통파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고령인
프리고진의 철학사상적 혜안이 더디게
진행되는 이론물리학적 연구결과를 앞질러
비약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프리고진의 주장은 단순히 결정론적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던 자연을 동양사상에서와
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같은
위치에서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기계론적 자연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이 모두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새로운
과학은 확실성과 우연 사이에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 발전하게 될 것이다.
<신국조. 서울대교수. 화학>
--평자는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요 논문으로 '용액
중에서 화학반응에 관한 동역학이론' 이
있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프리고진
지음·고려원) 등의 책을 번역 출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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