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6

내가 우리 화학과에 입학한 것은 1965년 봄이었다. 당시에는 동숭동에 문리과대학의 캠퍼스가 있었으며 화학과는 본부건물 뒤로 구름다리로 연결된 공업시험원 뒤쪽의 허름한 창고와 같은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의실은 본부쪽과 공업시험원 쪽에 나뉘어져 있었고 일제시대의 건물인지 대부분이 목조건물이라 강의실 옆으로 기다란 마루가 복도였으므로 수업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나 끝난 후에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동할 때는 와르르 우당탕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1학년 때 수강하는 일반화학실험은 청량리에 있는 실험실에서 오후에 하였기 때문에 실험이 있는 날은 동숭동에서 점심을 부리나케 먹고는 청량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첫번째 실험이 있던 날 우리는 기대에 부푼 채 청량리로 향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기척도 없이 을씨년스러운 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운데 가장 흉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깨어진 유리창이 방치된채로 우리들 30명의 병아리를 맞아들였다. 옹기종기 모여든 병아리들은 너무도 기가 막혀 어리둥절한 채로 시간이 되어 조교선생님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느닷없이 실험실에 딸려있는 작은 구석방의 문이 열리더니 안경을 낀 우리의 험상궂은 조교선생님께서 나타나셨다. 한아름의 유리대롱을 안고 나와 실험실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우리를 씨-익- 훑어보고는 "알아서 해!" 하고는 다시 자기의 아지트로 사라져 버렸다. 첫 시간인만큼 무언가 인사말씀과 자세한 지시를 기대하였던 우리는 얼떨떨해하다가 이윽고 킬킬거리며 유리대롱을 낚아들고는 이리 자르고 저리 꺾고 난리를 치며 실험실 벽 쪽에 설치되어 있는 구닥다리 분젠버너를 켜고 이리 꾸부리고 저리 뽑고 신나게 장난을 쳐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녁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었고 실험실 바닥에는 온통 유리대롱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유리대롱 놀이도 어지간히 하였고 뱃속도 출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 아닌가 하고 꽉 닫힌 조교선생님의 방문을 곁눈질하며 이제나 저제나 해산 및 귀가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대하던 우리 중의 성미 급한 친구가 용감하게 방문을 노크하였다. "저어--, 다했는데요...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두 번째로 나타나신 조교선생님의 청천벽력같은 말씀은 세척병을 다 만들었으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더 이상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리대롱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기가 차고 배고픈 병아리들은 웅얼웅얼 불평의 수군댐을 시작하였다.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하신 그분은 "모두 집합!" 하고는 단 위로 올라가서 성난 사자와 같이 우리를 꾸중하셨다. "당신네들은 모두 xxx 들이야!"로 시작된 성난 질타가 한동안 이어졌고 결국 다시 한 두름의 유리대롱이 배부되었으며 작품을 제출하기 전에는 귀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화학실험은 결국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날 수 있었고 실험실을 나와서는 캄캄한 밤하늘의 총총한 별만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화학실험은 공포의 나날이었다. 실험보고서는 물론이고 수시로 부과되는 실험과는 관계없는 내용의 숙제를 제출할 때면 한바탕씩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요즈음처럼 과대표가 수합하여 일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호랑이를 상대로 각개전투에 임해야 하는 것이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를 주저하면서도 할 수 없이 들어가서 공손히 보고서를 제출하면 쓰-윽 훑어보시고는 "이게 보고서야? 다시 해 와!" 하고는 사정없이 바닥에 팽개쳐 버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군말 한 마디를 드리면 날벼락이 떨어지곤 하였으므로 놀란 강아지들은 후닥닥 꽁지를 말아 감추고는 문 밖으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재도전, 삼도전... 끝에 보고서 제출에 성공하면 드디어 그 주간의 실험 스케쥴이 완료되고 우리는 다시 다음 주의 전투에 임해야 했다. 우리 중의 한 여학생의 부친은 매주 청량리 실험실 문 밖에서 기다리시다가 집으로 데려가셨고 결국 1년 후에 그 여학생은 물리학과로 전과하여 우리 곁을 떠나가 버렸다.

당시에는 그렇게도 소름끼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조교선생님은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고마운 분으로 남아 있고 그러한 가차없는 스파르타식의 훈련은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어 주었다.

동숭동에서의 실험은 2학년 때의 분석실험부터였다. 그 실험은 독자적으로 3학점을 따야 할만큼 큰 비중이 주어져 있었으며 일주일에 2, 3일 정도는 실험실에서 살아야 했다. 공업시험원 뒤쪽의 허름한 창고와 같은 건물이 분석실험실이었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새어서 실험대 위에 뚝뚝 떨어져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물론 후드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독가스를 직접 체험하는 귀한(?) 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비오는 날에 시료를 산 용액으로 추출하기 위하여 가열할 때면 그 상황이 극에 달하였다. 겨울의 난방시설은 실험실 한 가운데 설치된 연통 달린 난로 한 대뿐이었다. 그나마 땔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우리는 주변의 허름한 폐창고를 기웃거리다가 용감하게 창고의 널빤지 벽을 뜯어내어 들킬새라 실험실로 줄행랑을 치곤 하였다. 시료를 고온 전기로에서 몇 시간씩 구울 때는 무료한 기다림을 핑계로 캠퍼스 밖으로 뺑소니쳐서 길 건너 '낙산다방'에서 커피, 꿀차 등을 시켜 놓고 노닥거리곤 하였다. 때로는 고구마를 사들고 들어가서 난로에 구워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족구나 팩차기 등이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고 캠퍼스의 위치상 강의와 강의 사이에 비는 시간에는 길 건너편의 민간 복지시설을 애용들 하였다. 공업시험원 건너편의 '낙산다방'은 화학과 학생들의 누더기 실험복들의 쉼터였고 문리대 운동장 건너편의 '대학다방'은 주로 교수님들이, 그리고 그 2층의 '학림다방'은 문과 쪽 학생들이 즐겨 찾는 아지트였다. 점심시간에는 예나 제나 중국집 짜장면과 짬뽕이 최고 인기였다. '낙산다방' 밑의 '공락춘'은 화학과의 단골집이었고 대학다방 옆의 '진아춘'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그냥 먹기는 싫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면 이들 중국집에 들어가서 짬뽕국물만을 시켜 놓고 도시락을 꺼내 들어도 아무도 우리를 내쫓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취미생활은 학교 주변의 당구장이 단연코 인기였다.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꼰아문 채로 엎드려 자세로 큐를 잡고 공을 겨냥하면서 짜장면 내기를 하곤 하였다. 때로는 서툰 솜씨로 "맛세" 연습을 하다가 주인 아저씨에게 혼이 나기도 하였다. 좀 더 고상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은 시내로 진출하였다. 극장구경은 예나 제나 마찬가지일 것이나 요즈음 학생들이 '르네쌍스', '아폴로', '디셰네' 등이 무엇인지를 알는지... 말하자면 당시의 노래방이었다. 다만 듣기만 하는 곳으로서, 종로 네거리에서 광화문 쪽으로 조금 가서 있는 '르네쌍스'와 을지로 입구 부근의 '아폴로'는 고전음악 감상실이었으며 '디셰네'는 신나는 팝뮤직의 전당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함께 즐기던 운동 중에는 수학, 물리, 화학의 3과 체육대회가 있었다. 농구, 배구, 축구, 소프트볼 등을 겨루는 시합이 3과 사이에서 수시로 방과 후에 있었고, 선수로 출전하지 않아도 많은 학우들이 뜨거운 응원전을 펼치곤 하였다. 가을에 개교기념일 무렵에 열리는 문리대 축제인 학림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요사이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타락(?)한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학술강연회, 장기대회, 음악회, 음주대회 등을 치르고 마지막에는 쌍쌍 파티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학문의 열기는 문리대 교정의 도서관에서 항상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단 한군데의 독서실에 해당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을 뿐이며 그 안에서 자습을 하거나 책을 신청하여 대출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의 명물은 그 입구에 버티고 앉아 있는 호랑이 수위아저씨였다. 출입하는 학생들에 대한 엄격한 학생증 검사는 물론이고 독서실 안의 훈육주임이기도 하였다. 떠들거나 기타 불량한 짓을 하는 학생은 가차없이 퇴장시키는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원하는 책을 대출 받아 일일이 손으로 베껴야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누구나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로니에 그늘 밑에 누워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봄에는 대학천을 따라 피어나는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를 바라보며 등교하였고, 이어서 교정에 가득 찬 라일락 향기에 마음 설레이었으며, 가을의 도서관 옆 샛노란 은행잎 단풍을, 대학 중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꿈에 가득찬 청춘시절을 지내던 문리대생들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92.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