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먼저 글을 올린 선형오빠, 윤재, 중건이와 같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SOR short course와 annual meeting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1. 숏코스
이번 숏코스의 제목은 "Resolving single particles and molecules: new microscopy techniques for rheology" 였습니다. confocal microscopy와 multiple particle tracking, optical tweezer 등에 대해 원리부터 시작해서 구성 장비, 적용 분야 뿐 아니라 셋업할 때 고려할 조건, 공급처까지 자세하게 알려주니, 봉잡았단 느낌이었습니다. 다들 자기 연구에 어떻게 적용할까 상상하면서 열심히 들었죠.
빡빡한 수업 일정에도 단 한 번도 안 졸고 열심히 들었는데... 호텔을 옮기는 와중에 모든 내용을 메모해둔 강의록을 방에 두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_- 돌아오자마자 두 군데 호텔에 열두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는데 없다는군요. 이름이랑 이메일 주소까지 써놨는데... 비싼 수업료 값을 하는 좋은 자료였는데, 너무 죄송하네요.
2. 시류에 민감한 SOR
중건이나 예전의 다른 분들도 적었지만, 이번 SOR에서는 microrheology와 biorheology 부문의 발표가 크게 늘었습니다. 4일간 열린 학회에서 마지막 이틀을 꽉 잡았죠. 유행 정도가 아니라 붐이라고 봐야할 것 같더군요. 지난 2월 SOR 만 해도 이거다 싶은 연구가 별로 없었는데, micro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유체를 컨트롤하고, micro 유변 물성을 측정하는 연구들이 무수히 발표되는 것을 보고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을 잘 못했거든요. 앞으로 한동안 지속될 것 같은데... 거기서 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 혼자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3. 너 박사 과정? 나도 박사 과정!
솔직히 이번 학회의 가장 큰 감상은, '열받는다' 였습니다.
학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박사 과정 얼굴들이 많이 나타나 발표를 했는데, 어쩌면 다들 그리 똑똑하게 연구하고 똑똑하게 발표하는지... 지난 ASAIO나 BMES에서는 제가 처음 접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발표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연구를 했는지 쉽게 느끼지 못했는데, SOR에서는 가슴에 팍팍 와닿더군요. 주머니에 한 손을 푹 찌르고 화려한 언변으로 막힘없이 발표하는데,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졌달까요. 연구 결과가 훌륭하면 꿇릴 것이 없는 곳이니까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충격도 받고, 부럽다 못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나도 똑같은 박사 과정인데, 내가 쟤네들보다 뭐가 못한가 싶어서요. 그래서 상당한 자극이 됐습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다고 하지만, 두고 보자고 속으로 외칠 수 밖에 없었어요.
4. 영어가 늘었다?
미국에서 영어만 쓰면서 살고 있으니 영어가 느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좀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법'에 대한 생각이요. 영어로 말을 한다고 하면, 머리 속에 든 것을 어떻게 영어로 만들어 끄집어낼 것인가에 대해서만 주로 생각을 하는데, 이제는 '어떻게 끄집어내는가'도 더 생각을 해야할 때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 영어' 하면 제일 먼저 말하는 게 발음이지만... 미국이 워낙 벼라별 사람이 다 모여있는 곳이다 보니, 모국어 악센트가 섞인 발음은 전혀 흉이 아니거든요. 문법 좀 틀려도 거의 상관 없고요. 하지만 오히려, 우리말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서 말할 때 사람들이 더 갸우뚱거려요.
예를 들어... 정숙 언니 포스터를 보고 있을 때 피츠버그 대학의 블랑카 교수가 다가왔는데요. '(관련 분야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의 포스터라서 궁금해서 설명을 듣고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처음에 'She's one of my Korean collegues, so...'라고 말을 시작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교수가 'I know!' 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휙 등을 돌려 사라지더군요. -_- 정숙 언니랑 둘이 잘 아는 사이거든요. 우리말로 했다면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닌데... '그게 아니고요...' 란 말을 등 뒤에 대고 아무리 외쳐봤자 이미 때는 늦은 거지요.
이런 상황이 일상에서도 종종 발생하지만, 가벼운 문화 차이 정도로 간주해서 제 행동을 설명할 기회가 어느 정도 있는 반면... 학회에서는 비지니스를 하기 위해 모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대화를 나눠야하다보니 상대방에게 일일이 설명할 기회가 많지 않은 거죠.
더 듣지도 않고 휙 가버려서 약간 기분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영어의 도를 더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멀고도 험한 영어의 길... ^^;
5. 다시 피츠버그에서 - 얼마나 쉽게?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이곳 실험실의 showcase 가 있었습니다. 전 단순히 오픈랩으로 알고 있었는데, 과학 전문 기자들이 기사를 쓰기 위해 실험실을 방문하는 행사였죠. 한 달 전부터 실험실 정리를 처음부터 다시 하고, 디스플레이 용 대형 LCD TV를 사서 설치하고, 기자들이 흥미 있어할 만한 동영상과 화려한 그림 자료들을 포함하여 연구 소개 자료를 만드느라 부산했어요. 결국 기자들 사정으로 취소되긴 했지만 ^^;
그래서 기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 소개 자료를 급하게 만드는 와중에... 내가 내 연구에 관해 과연 얼마나 잘 알고 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들의 백그라운드가 얼마 정도인지 몰라서 연구 동기를 중심으로 최대한 쉽게 만들고 있었거든요. 이 정도면 중학생도 이해시킬 수 있겠다고 농담할 정도로.. ^^; 그런데 다들 아시듯이, 정말 잘 알아야만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가 있잖아요. 그게 참 쉽지가 않더군요. 또, 유변학회에서 발표할 때 받을 만한 질문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엔 어디서 '왜?'가 튀어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전에 엘리베이터 스피치에 대해서도 적은 적이 있었는데, 이것도 자기 연구로 한 번 시험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부모님을 붙들고 자기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설명드려보는 것은 어떨지... ^^ (부모님은 '왜?'라고 안 하시고 '장하다, 우리 아들/딸' 이라고 하셔서 문제지만.. ^^a)
6. 남은 석 달...
이제 피츠버그 생활도 딱 석 달이 남았습니다. 석 달이라고는 하지만, 11월 마지막주에는 추수 감사절 연휴가 있고,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학교 전체가 일주일 정도 문을 닫는다고 하니, 실질적으로는 두 달 반도 채 안 남은 셈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예비 실험을 마치고 본 실험에 들어가기 전의 공백이 길어져서, 예정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남은 시간을 단 하루도 낭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솔직히 조급합니다. 지난주만 해도 혈액을 300ml나 받아두었는데, 가장 중요한 혈액 펌프가 작동되지 않아서 전부 분해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느라 결국 실험을 못했죠. 하지만 새한이가 적은 것처럼, 조급해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또다른 실수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게 있어 이번 SOR은 '자극'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자극이 제게 얼마나 유효한지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생은 도전의 연속... 제게 작은 도전의 기회를 주렵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 정말 하나도 안 무섭다지만... 다시 한 번 '두고 보자!'를 외쳐봅니다.
0. 운이 좋은 데서 끝나면 안 된다.
Last but not least... 이번 학회를 전후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꼽으라면 'You're lucky!' 입니다. 발표를 하지 않는 학생이 세 명이나 참석했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워했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예전에는 그게 왜 운이 좋은 건지 잘 몰랐습니다. 단순히 공짜로 외국에 나가는 게 부럽다고 생각했죠 ^^; 하지만 그 기회가 제게 안겨주는 선물을 느끼면서... 운이 좋은 데서 멈추면 절대로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고 있습니다. noblesse oblige 라고 생각해요. 제가 늦된 것일 뿐,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실 이야기라고 생각하네요. ^^;
그런 의미에서, 이런 긴 글에 다 적지 못할 정도의 경험을 갖게 해주신 두 분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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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이: 4. '영어가 늘었다' 의 상황이 어떤건지 이해가 안가요.. 설명해 주심 안될까요? 저도 뼈속까지 콩글리쉬? -[11/08-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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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지도: 영어는 맞게 했는데... 대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달라서 오해를 받았단 얘기 ^^; -[11/09-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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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지도: I was listening to her 'cause I know her, though her work is not that relevant with mine 이라고 하면 됐는데, 말을 저렇게 시작하니까 '알거든?' 하고 휙 갔다고.. 내가 설명을 잘 못했나보다 ^^; -[11/09-0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