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어서 지리적으로 접근이 쉽다는 이유로 SOR 에 참석한 게 세 번째인데, 지난번과는 임하는 각오와 끝난 후의 감회가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국제 학회에서 첫 오럴 발표를 할 기회였는데, MIT 에서 했던 일을 가지고 발표하느라 학회 사흘 전까지도 밤새서 실험을 했거든요. 맘 졸이던 실험 결과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나왔을 때의 그 기분이란...


1. 발표 준비는 철저히!

작년 SOR 에서 수잔 멀러 그룹의 한 박사 과정 학생이 좋은 결과로 능수능란하게 발표하는 걸 보고 좀 열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실험 결과야 본인이 평소에 한 만큼 나온 거겠지만, 논리 정연한 발표 자료와 자연스러운 발표 자세가 무척 부러웠어요. 그런데 그 비결은 철저한 발표 연습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유명한 교수 그룹의 학생이 SOR 발표 전날까지도 학회장에서 연습하면서 교수한테 깨졌다느니, 다른 사람 발표에도 안 들어가고 호텔방에서 밤새 발표 연습을 했다느니 하는 얘기는 가끔 들었는데, 농담이 아니었더군요. 저도 그렇게 될 줄이야 ^^;
우선 학회 전 그룹 미팅에서 연습 발표를 한 뒤에 (practice talk 혹은 dry run 이라고 합니다) 발표 자료를 60% 정도 업그레이드하고, 발표 당일 맥킨리 교수와 아침 식사를 하면서 추가로 내용을 수정했어요. 교수도, 함께 일하는 포닥도, 발표 자료는 물론 발표하는 태도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끊임없이 피드백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꾸 다듬어가면서 저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요.  
물론 틈날 때마다 호텔방에서도 연습을 계속했어요. 연습의 주안점은 '연구 결과를 명료하고 쉽게 전달할 것',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발표할 것'이었습니다.
그래놓고도 실전에서는 긴장한 나머지 말이 빨라져서 예정보다 일찍 마치긴 했지만, 첫 영어 발표치고는 자신있고 부드럽게 발표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어 발표의 경우, 원래 하려던 말이나 순서를 잊어버리면 순간적으로 다른 표현을 생각해내기가 어렵거든요. 그럴 때 연습이 특히 빛을 발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농반 진반으로 '발표야 평소 실력으로 하는 거지~' 했는데, 절대 아니에요!! 연습하세요~!! 연습할 때 옆에서 잔소리하면서 훈수 놔줄 사람도 꼭 챙기시고요 ^^ 저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잔소리꾼이 되어드리겠습니다.  


2. 경쟁

흔히 유럽 유변학회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이론 연구를 많이 발표하고, 미국 유변학회는 펀드 따기 좋은 트렌디한 실험 위주의 연구를 많이 발표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이크로채널, 미세유변학에 관한 발표가 크게 늘었더군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발표했던 wormlike (혹은 rodlike) 마이셀 용액에 관한 연구도 꽤 많았어요. 상업적으로 매우 흔히 쓰이고 있는 물질인데 거동이 복잡해서 아직 다양하게 연구가 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솔직히 학회는 다가오고 실험 결과는 안 나올 땐, 왜 내가 시키지도 않은 학회 발표를 자원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이번에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내년에는 발표도 못 하고 묻힐 뻔 했더군요. 그만큼 저랑 비슷한 연구를 한 사람이 많았어요.
재밌었던 건, 저랑 비슷한 연구를 했던 다른 그룹들도 딱 제가 한 만큼 연구가 진행됐더라는 점이었죠. 지난 SOR 이후로 1년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의 양이 어느 정도 제한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바꿔 생각하면, 아이디어를 얻었을 때 얼마나 빨리 그걸 구체화하고 실현하느냐가 중요하단 얘기가 되겠죠. 누구나 밤새서 연구하며 전력 질주를 하는 상황에서는 누가 더 똑똑한 행보를 보이느냐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한 마디로 정책 결정의 중요성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고요 ㅡㅡ; 참 연구 힘들어요...


3. 인맥1

잘 떠들고 잘 노는 맥킨리 교수 그룹 학생들 덕에, 저도 이번에는 '미국애들'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애들은 술도 많이 안 마시고 얌전하게 논다고 생각하는데, 웬걸, 밤마다 술 퍼마시면서 참 잘~ 놀더군요 ^^;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연구 얘기는 빠지지 않았어요. 맥주 퍼 마시면서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과연 컴백할 수 있을까 없을까 떠들다가도 순간적으로 연구 얘기가 나오면 거기에 몰두해서 한참을 떠들어대고... 예전에 처음 MIT 왔을 때 실험실 애들이 같이 밥 먹으면서 떠들다가도 자꾸 연구 얘길 하면서 토론을 벌이길래 MIT 애들이라 그런가? 했더니만 다른 애들도 그렇더군요. 그만큼 생활과 연구가 합체가 되어야 진정한 박사 학위를 딸 수 있게 된단 뜻일까요?
어쨌거나, 같이 술 먹고 떠들고 노는 와중에 저도 도움되는 정보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어요. SOR 에서 오럴 발표를 할 정도면 보통 박사 3년차 이상이었기 때문에 통하는 것도, 공감가는 것도 많았고요. 학회 참석의 목적 중 하나가 비지니스라고 하는데, 학생 수준의 비지니스는 어느 정도 해냈지 싶습니다. 후훗. (첨부한 사진도 제 발표를 마친 날 술집에서 찍은 거예요.)


4. 인맥2

제 발표장에 사람들이 꽤 많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연구 주제라는 것도 있지만, 맥킨리 교수의 이름이 뒤에 붙은 게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어가 부족해도 내 연구 결과가 훌륭하고 요점을 똑똑하게 전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기울여 준다고 하는데... 우선은 그 전에 내게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가 한 가지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성도 그 중 하나였지요. 제 발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의 발표들은 모두 명불허전이었어요.


5. Bingham Roast

다음에 SOR 에 참석하실 분들은 사비를 들여서라도 banquet 에 꼭 참석하시길 권합니다. 해마다 SOR banquet 에서는 빙햄 메달을 수여하는데, 수여식 직전의 수상자 골탕먹이기 (= roast) 가 정말 재밌거든요.
올해 수상자는 MIT 교수인 Robert Armstrong 이었습니다. 지금 절 데리고 있는 맥킨리 교수의 지도 교수이자, 선생님 수업 '고분자 유변학'의 교재인 Dynamics of Polymeric Liquids 의 저자 중 한 사람이지요. 요즘은 연구 주제가 유변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유변학회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는데, 이번에 수상을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참석했습니다.
이번 roast 는 수잔 멀러 교수와 나비 넥타이로 유명한 재커민 교수가 했는데, 암스트롱 교수의 학부 시절 성적표까지 뒤져가며 "Arm-not-strong!" 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전공 과목은 전부 A를 받았는데 학기 마다 수강했던 체육 과목은 번번이 B 아니면 C 였거든요. 흐흐.
신나게 낄낄거리던 맥킨리 그룹 학생들이, 나중에 맥킨리 교수가 메달을 받는 날을 위해 망가진 사진을 찍어두자며 절 시켜서 몇 건을 올렸지요. 맥킨리 교수가 절 혼내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그 사진을 본 다른 그룹 학생 왈, "Oh, this is Bingham material, for sure!" (이 개그가 이해가 안 가시면 따로 메일을...)
그런데 솔직히 밥은 별로 맛이 없어요 ^^;


6. 마지막으로 자신감.

위에서 명성과 인맥에 관한 얘기를 적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의 자신감은 그에 전혀 못지 않은 중요한 요소지요. 지도 교수님의 명성을 뒤에 업고 얻은 자신감일지언정, 자신감이 없어서 먼저 질문하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모습에 변화를 얻었다는 것은 제게 중요한 소득이었습니다.
"What are you doing now?" 라는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는 성식 오빠의 말씀은, 제겐 그 다음 단계인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밟아가는 거겠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머네요. 아, 이것 참 연구 힘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