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학회에 대한 내용은 다른 분들이 많이 얘기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개요.
2008년 ICR을 다녀왔습니다. 유럽 유변학회와 미국 유변학회, 게다가 일본의 대가들도 모두 모이는 엄청난 규모의 학회, 4년마다 한번씩 대륙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이런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무대에서 발표를 한다는 기대감과 부담감에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학회였습니다. 학생 입장에서 발표는 연구 내용보다는 발표자 자신의 값을 매기는 신제품 설명회이면서, 큰 학회일수록 좀 더 큰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더불어 무엇보다 외국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하는 한국인은 제 발표장에 함께 있는 한국인들에게 긍지를 줄 수 있는, ‘나는 한국의 학생 대표 중 한명이다’ 라는 약간은 유치한 생각도 하면서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준비한 대회였습니다.
2. ICR 발표 20일 전
발표는 우선 발표 형식이나 전달 방법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완성도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연구 내용이 좋아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제가 준비한 발표는 실험 결과만 나열한, 뭔가 완성도가 떨어지더군요. 안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완성도를 높이는 일에 집중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출장 열흘 전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결과를 얻어서 정말 다행으로 생각 했었습니다.
3. ICR 발표 10일전 내용 구성 및 리허셜
15분 발표이니 구성은 제목 빼고 15장 기준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역시 발표 자료를 구성하고 다듬는 데에는 리허설만한 방법이 없더군요. 내용 일차 구성후 일단 리허셜을 한번 가졌는데, 여기에서 많은 조언이 정말 유익하였습니다. 교수님 지적 뿐 아니라 우주의 서론이 너무 길다는 지적, 난주와 성교수님이 지적한 부자연스러운 흐름 등의 지적은 정말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난주가 얘기한 슬라이드마다 ‘이거이거는 몰라도 이건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는 강조, 이런 방법은 Delaware의 Prof. Furst가 잘하는데, 발표 듣기 정말 편하더라’ 등의 조언은 정말 좋았고, 이런 내용 바탕으로 2차 수정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차 리허셜 들어갔는데요, 이번에는 제 연구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최창균 교수님 연구실 주형이에게 부탁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2차 구성에서는 우선 한번 고치고 난 후라 어느 정도 좋아지지 않았을 까 했는데, 역시 발표나 논문을 써본 경험자들은 다르더군요. 리허설을 한번 하고 나니 부족한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이번에는 1차와 달리 슬라이드 한장 한장 꼼꼼이 지적해 줄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프 사이즈에서부터 notation, reference 표기법, 단위 등등… 2차에서 꼼꼼하게 지적해준 성교수님, 난주, 주형이와 중건이, 정말 고맙습니다. 여튼 이렇게 2차 리허셜이 끝나고 구성 완성을 끝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교수님이 한번 더 봐주고요.
4. 발표 5일 전 대본 연습
리허설 하면서 대본은 어느 정도 만들었지만, 핵심 용어만 나열한 정도이지, 그다지 문장 구성에는 집중하지 않았는데요, 2차 리허셜후 내용 구성 끝낸 후 문장으로 다 적어서 읽어보고, 외워서 시간을 재 보았는데, 읽을 때에는 15분 걸리던 대본을 외워서 하니 19분이 걸리더군요. 너무 이상해서 제 발표문을 읽은 것과 외운 것을 녹음해서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런!! 외워서 한 것은 정말이지 민망할 정도로 더듬더듬하더군요! 제가 아무리 빨리 발표한다고 하더라도 녹음해서 들을 때에는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더듬더듬하고 띄워읽기 전혀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내가 발표하면 책읽는 것 같다고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대본을 실제 발표를 가정해서 읽어서 녹음하고 이걸 듣고 따라하면서 다녔습니다. 마치 영어 듣기 공부 할 때 MP3 끼우고 다니듯이요. 이렇게 며칠 해보고 다시 연습하니 처음 심하게 더듬던 것 보다는 많이 좋아졌는데, 아직도 16분은 넘기고 있었습니다.
5. 발표 3일 전 출국 ~ 발표 전날
발표 내용을 보고 또 보고… 외우고 연습해도 읽는 것보다는 시간이 길어지더군요. 들어보니 약간 더듬더듬하고 다음 내용 생각하거나 말이 막히는 부분에서 수초 정도 밀리고, 그게 쌓이다 보면 전체적으로 수십초에서 수분 늦어지더군요. 그래서 막판에 시간 없으면 정신없이 급하게 넘어가는 현상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가만히 발표 내용을 보니 intro / result 1/ result 2 / modeling and conclusion 이렇게 4파트로 나누어지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게 슬라이드에서 시간 없으면 얘기 안해도 되는 부분과 꼭 얘기해야 하는 부분을 나눈 후 얘기 해야 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외운 후 4파트 각각의 시간을 할당하고 시계를 보면서 파트별 시간을 체크하면서 다시 연습해보니 시간 배분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말 막히면 당황 안하고 그 문장은 통째로 빼고 생각 나는 거 얘기하고 난 후 슬라이드의 마지막 부분에 ‘What I want point out in this slide is~’ 또는 ‘In this slide, here I want to tell you~’ 이런식으로 중요한 부분을 약간 천천히, 크게 또박또박 얘기해 보니 전체적으로 시간 안배에 여유가 생기면서 중심 내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통째로 외워야 한다는 부담을 없애기도 했구요. 이제는 시계 보면서 발표를 해보니 16분 안에 끝나더군요.
5. 발표 당일
부담감도 컸지만 관객들이 많이 모이기를 내심 기대도 했었습니다. 제 발표는 첫날 오후인데, 알고보니 세션이 무려 12개나 있더군요. 자세히 보니 같은 시간대에 대가들의 발표도 있고, 인기있는 발표가 많이 몰려있어 제 발표는 그다지 흥행거리는 아니겠다라는 생각에 약간은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제 발표시간과 중건이 발표시간이 겹치더군요. 중건이가 ‘그래도 올사람은 다 온다’고 하더군요. 다시 생각해보니 관객이 많이 몰리는 것 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저에게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분위기에 익숙해 질 겸, 점심 시간에 아무도 없을 때 발표 무대에 서서 한번 연습을 해보았는데, 무대에서 바라보니 생각보다 발표장이 부담스럽지 않게 생겼더군요. 연습하는 도중에 희경이가 잠깐 기웃거리고 웃고 가고, 브라질의 Prof. Carvalho가 발표장 확인하러 왔는데, 저 연습하는 걸 보더니 손 잠깐 흔들고 갔습니다.
3시 50분에 한 제 발표는 약 20명 정도 있는 듯 하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1시간정도 전 발표장에서 예행 연습을 해서 그런지 발표하면서 발표장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맨 앞의 좌장인 안교수님이 다리를 꼬고 앉아 계셨고, 서강대 이재욱 교수님이 세번째 줄에서 팔짱 끼고 앉아 계셨고, 중간에서 약간 뒤쪽에 고대 김성현 교수님이 눈을 크게 뜨고 앉아 계셨구요. 제 발표 다다음의 박승준 교수님도 계셨고, 일본의 Yamamura 교수님도 있었고, 브라질의 Carvalho 교수님을 빼고는 다른 분들은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제가 중간에 강조를 하거나, 중요하다는 사진을 얘기할 때 몇몇은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기울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표를 하면서 자주 하는 실수는 발표 시작 전 준비한 stop watch를 시작하지 않는 것인데, 이번에도 한참 발표하다 시간 확인하러 시계를 보는 순간 발표 시작하면서 stop watch를 start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약간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낌상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아 원래 속도대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사전에 제 발표가 어떤지 궁금해서 발표를 녹음하기 위해 MP3를 작동시키고 무대에 올라갔는데요, 발표가 끝나고 나니 16분이 녹음이 되어 있더라구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녹음을 시작했기 때문에 총 발표는 15분 30초정도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목표가 16분 발표에 4분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단 첫번째 목표는 달성한 셈입니다. 이제는 질문인데요, 안교수님 바로 뒤에 있던 분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다행이 예전에 김종엽 교수님께서 하신 질문과 같아서 어렵지 않게 대답하고, 바로 다음 Yamamura 교수님 질문도 실험에 대한 질문이라 대답을 하고 나니 다시 앞에 앉아서 처음에 질문했던 교수님이 연달아 2개를 하시더군요. 운이 좋은 것은, 제가 받은 4개의 질문이 모두 장황하지 않아 대답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6. 발표 후
발표 후 예상 외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발표 후 제 자리에 오니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발표 좋았다고, 혹시 발표 내용 publish 했냐고 물어보더군요. 아직 안했다고, 가면 할거라고 했더니 발표자료를 주면 안되냐고 하기에 제가 좀 애매하다고 하니 명함을 주면서 논문 submit 하면 자기에게도 꼭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명함을 보니Dr Andrew M Howe라고 Kodak의 연구원으로 적혀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발표도 하고, 학회에 꽤 익숙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발표 내용을 보니 Kodak에서 inkjet printing 전용지 관련 연구를 하고, 잉크젯 전용지가 silica-PVA base material을 코팅해서 제조하기 때문에 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명한 사람들하고도 꽤 친분이 있어 보이구요. 그냥 연구원은 아닌 듯 해서 googling을 해 보니 유변학회에 꽤 오랬동안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journal of colloid and surface science의 editorial board member이더군요… RSI (Royal Socisty of Chemistry)의 colloid and surface committee의 위원장이기도 하구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또 제 발표에 질문을 3개나 하던 사람은 나중에 안교수님께 여쭈어 보니 Princeton의 Prof. Russel 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 앉아 있던 정체 불명의 한국인은 스트레스 장비에 대해서 발표 끝나고 따로 물어보고, KIT의 Prof. Yamamura는 다른 세션의 쉬는 시간에 제게 오더니 이거 저거 물어보면서 30분 정도 따로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날 또다시 한 번 더 미팅을 했습니다. 브라질의 Prof. Carvalho도 발표를 들었으니 나름 많지 않은 사람 중에 제 연구와 관련해서 필요한 사람은 다들 듣고 있었던 듯 합니다. 학회 발표에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발표 한번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고 반응을 보면서, 혹시라도 제가 한 내용이 이미 알려진 내용이거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거의 없어졌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논리적으로 논문을 최대한 빨리 쓰는데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질문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 보니 추가적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좀 더 명확해지더군요. 사람들이 이런 것을 궁금해 하는구나… 이걸 더 하면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구나, 다음번에는 이런 결과를 좀 더 보여줘야겠다 등등…이게 발표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발표하면 다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큰 학회에서 발표를 하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면서, 공들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발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7. 마치며
보람도 있었고, 발표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기술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국어자들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설프지만,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건 아닌 듯 합니다. Russel 교수의 질문은 속도가 느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쉽게 이해하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외국인 학생에게 질문하는 교수 입장에서 봐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지금이야 학생의 발표이고, 경험이 많지 않은 느낌의 발표이기에 그럴수 있다고 쳐도, 언젠가는 동등한 입장에서 communication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테니, 질문하는 사람이 자신의 내용을 이해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저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좀 더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내용도, 발표 기술도, 표현이나 화법 등 아직 개선할 여지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다음 학회 발표는 좀 더 완성도 높은 내용 뿐 아니라 세련된 발표 기술과 표현으로 외국인으로서 영어 발표를 잘 했다고 평가 받는 수준이 아닌, 모국어자들을 포함해서도 발표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주신 교수님들과 발표 준비에 도움을 준 실험실원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양주 사왔으니 얼렁 볼링 치러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