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미국 위스컨신 주 매디슨에서 열린 91회 미국 유변학회 참석 후기입니다.


1. 내 발표
제 구두 발표 제목은 "Alteration of flow configuration in planar contraction microchannel under electric field" 였습니다. 원래는 두 파트로 나눠서 1) 마이크로 채널 크기 변화에 따른 와류 거동의 변화, 2) 전기장에 의한 와류 변화를 모두 발표하려 했는데 전기장 실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자꾸 시간이 흘러가자 실험에 손이 많이 가는 앞부분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전기장 실험 결과를 쌓는 데에 집중했어요. 하지만 한 달 전 제 룸세미나 발표에서 보셨듯이, 뭔가 신기한 그림은 있는데 앞뒤로 정리가 안 되고 설명도 못 하는 답답한 상황이었지요. 연구할 때 큰 그림과 줄거리를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일은 하고도 남는 게 없는 딱한 상황에 빠지는데 저도 그 직전이었습니다. 오히려 발표 준비하면서 정리가 되었어요. 이번에 똑바로 못하면 국제적 개망신이란 위기감에 ^^ 몇 달 동안 정리 못하던 것을 닥쳐서 정리하려니 형식이 거칠기가 이를 데가 없었는데 여러분의 도움으로 발표 자료가 환골탈태했습니다. 연습 발표할 때 다들 시간 내서 들어주시고 지적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발표 연습은 공항과 호텔에서 계속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SOR 은 특히 25분으로 발표 시간도 긴데 다들 발표를 잘하고 말을 굉장히 빠르게 해요. 대신 서로 아는 사이가 많다 보니 말투가 보다 편하고 미국식으로 격식도 덜 차리지요. 그에 맞춰 연습했고, 사실 이건 자신 있었어요.
본 발표를 하게 됐을 때의 걱정은 역시 내용에 관한 부분이었어요. 남들이 선보인 적 없는 신기한 내용이고 제 나름대로 앞뒤가 맞는 줄거리를 세워 설명했지만 실상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상태인데 청중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어서요. 발표 자체는 큰 실수 없이 무난하게 마쳤지만 끝나고 나서 간단한 질문이나 코멘트 밖에 없었을 때는 그래서 굉장히 실망하고 속상했습니다. 그렇게 할 말 없는 발표였나 싶어서요. 아는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이 발표 재미 있었다고 말해줘도 빈말 같이 느껴져서 하루 종일 어깨가 쳐져 있었어요. 그러니 나중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코멘트와 조언을 해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게, 학회가 강의실에서의 발표-짧은 질문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강의실 밖의 토론이 더 큰데 그 생각을 못했어요. 발표 재미 있었고 제 가설이 납득이 갔다는 말을 맥킨리 교수님께 들었을 때는 가슴 답답한 게 확 내려갔어요. 그 외에도 몇몇 분들께 머리 속에서 전등이 딱! 켜지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얼른 확인해보고 싶어서 신나요.
발표 연습할 때도, 발표를 하고 나서도,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얻었네요. 우리 실험실이 서로 의논 많이 하고 잘 도와주는 분위기여서이기도 하고요. SOR 도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작아서인지 서로 친/친근하고 잘 도와주려는 분위기입니다.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고 제 발표가 학회 초반이라 청중이 많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발표 준비하면서 연구 내용을 크게 정리하고 조언도 받았으니 여러 모로 연구 방향 설정에 학회 발표가 도움이 된 셈입니다. 학생으로서 국제 발표 기회가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할 때 더 많은 것을 준비해서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크지만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용기는 충분히 충전되었어요. 연구에 회의가 들 정도였는데, 이 문제 잘 해결해서 내년에 다시 오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어서 놀랐습니다.

2. 남의 발표
월요일-목요일 일정에서 화요일 아침 일찍 발표를 마치고 나머지 발표는 좀 편한 마음으로 들었는데 이번엔 유달리 재미있는 발표가 많았어요. 셋째 날 Plenary lecture는 웜라이크 마이셀 용액에 카오스 이론을 적용한 인도의 물리학 교수님이었는데 (Prof. Ajay Sood), 실시간에 따라 측정한 레오미터 결과에 SALS 결과를 결합시켜서 chaotic data analysis를 적용한 내용은 쏘 쿨! 했습니다. 뭔가 정치적인 이유로 레이저 사용을 금지당했다는데 진정한 지식인은 제약에 굴하지 않나 봐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번 학회에 물리학과에서 발표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더군요. 다들 '전 사실 유변학자가 아니라서요'라며 발표하는데 문제를 보는 관점이나 방법론이 우리랑 달라서 재미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유변학자도 물리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어쩐지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요.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교수님(조지타운 대 Daniel Brown)의 발표 중에 confocal 현미경을 레오미터에 붙여버려서 측정과 동시에 가시화를 하는 발표가 있었는데요. '자기가 왕인 줄 아는' 왕 교수님 랩에서도 비슷한 결합 장비를 이용한 연구를 발표하고 다른 그룹에서도 그 장비를 이용해서 연구를 했더군요.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사진이 근사해서 신기하면서도 결합한 현미경이 우리 실험실의 confocal 현미경 같은 것이 아니라 일반 현미경처럼 보여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Eric Furst 교수님 발표에 등장한 Nipkow confocal 이라는 방식 같습니다. 우리 실험실 것과 다른 종류인 것 같은데 정확히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 외에 기억에 남는 발표는 LAOS를 '가시화'한 맥킨리 교수님 연구실 출신 Randy Ewoldt 발표랑 희경이의 연구 내용과 많이 관련된 Jason Rich 의 발표, 마지막 날 도훈 오빠의 발표, 또 packaging engineer의 고충을 온몸으로 보여준 Procter&Gamble 회사 사람의 웜라이크 마이셀 coiling 문제 발표가 있었습니다. 회사 이름은 귀에 설 수 있지만 펜틴 샴푸 만드는 회사인데요. 계면활성제의 농도를 충분히 높이고 이온 물질을 첨가하면 웜라이크 마이셀이 되면서 점도가 크게 증가하는데, 샴푸가 딱 그거거든요. 샴푸 제조 공정에서 통에 샴푸를 짜 넣을 때 웜라이크 마이셀이 coiling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병을 꽉 채우지 못하고 빈 공간을 남겨두게 되는데요. 이걸 제거하고자 현상을 연구한 내용이었습니다. 인상적인 건 질문 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해도 '회사에서는 패키징 엔지니어 말 듣고 샴푸 조성을 바꾸지는 않는다' 한 마디에 나가 떨어지더군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외에 발표 세션 고르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저는 첫날, 둘째 날 오전에 있었던 마이크로채널/마이크로리얼러지 세션에서 발표했는데, 막상 그 세션에서는 저한테 별로 의미 있는 발표가 없었어요. 희경이 PTM에 관련된 발표도 전무했고요.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gelation이 일어나는 계의 micro/bulk rheology를 비교한 연구를 했다면 내 연구 주제는 microrheology니까 그쪽에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실상 microrheology 기법은 이미 정립됐거나 남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수단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gelation이 일어나는 계이거든요. 그러니 그에 관련된 세션에서 발표를 한 거지요. 무엇이 보다 중요한가, 어디서 조언을 더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단순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이름을 알면 발표를 들으러 온다'는 명제입니다. 저명한 학자라서 이름을 알 수도 있고, 연구하다가 만났거나 학회에서 놀다가 만나서 이름을 알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름을 알면 발표를 들으러 간다는 거지요. 거기서 잘하면 더 이름이 알려지고요. 발표 후에 이런저런 조언을 받은 것을 생각했을 때 결론은 '그러니 알려라'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SOR은 말을 빨리 한다는 얘길 했는데, 심지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지역 억양이 심한 경우에도 그렇게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또박또박 조리 있게 말하고요. 가끔 억양이 지나친 경우는 듣는 사람을 배려 안 하는 이기심에 조금 분노했지만 ^^ 어쨌거나 많은 연습의 결과겠지요. 듣는 사람의 시간을 절약해주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차원인 듯합니다.
그 외 학회 분위기를 살피면, 아무래도 경기 침체의 영향이 약간은 느껴졌습니다. SOR은 풍족한 학회라서 늘 공짜 밥에 경품이 널렸는데 (저도 수혜자이긴 하지만 경품의 본질은 손님 끌기인데 대체 왜 학회에 경품이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엔 평소보다 적었어요. 구두 발표 취소가 유난히 많고 심지어 예고도 없이 그런 경우마저 많았는데 대부분 멀리서 이동하는 경우 비용이 없어서인 듯했습니다.
또 최근 4,5년간 microfluidics와 micrheology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particle system이 안착을 했는데요. 구형 입자에 농도가 높아서 shear-thickening이 일어나는 계가 주였는데 저는 관심이 없어서 많이 듣지는 않았습니다. 첫날 Plenary lecture에서 Norm Wagner 교수가 그런 계에 대해서 발표했는데, 우주 말로는 이젠 그 사람 이론이 대세가 됐다고 하더군요. SANS로 남들이 못하는 가시화를 직접 해버리니 할 말이 없죠.
이런저런 구경과 생각으로 그간 참석했던 것 중에 가장 재미있는 학회가 됐습니다.

3. 과외 시간
학회에 참석하면 현지에서 관광도 하게 되는데, 매디슨은 워낙 작은 도시라서 볼 것이 많지 않았어요. SOR의 특징이 늘 그런 작은 도시에서 열린다는 건데 장점은 물가가 싸고 식비가 덜 든다는 점이지요. 돌아오기 전에 목요일 오후가 비었는데 비가 오고 추워서 멀리는 못 가고 학회장 바로 앞에 있는 위스콘신 주의 주 청사(state capitol)와 근처 작은 박물관 두 군데를 구경했어요. 전 박물관을 좋아해서 만족했지요.
그러나 진정한 관광은 그 이후였으니... 매디슨에서 시카고, 도쿄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출발을 했는데, 시카고의 악천후로 항공 운항이 지연되어 태평양 건너는 비행기를 놓쳐버린 거예요. 이런 경우 항공권은 다음 비행기로 무료로 바꿔주지만 태평양 건너는 비행기는 오전에만 출발하거든요. 2년 전 SOR 때도 같은 사건으로 9명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하루 노숙했는데, 이번엔 진석이, 성업이, 저 세 명에다가 같은 비행기를 탔던 교토대 학생 사토루까지 넷이서 시카고 공항에 남겨졌죠. 여기서 반전은, 이 경우 항공사에서 호텔 할인권을 제공하며 할인 폭이 50%가 넘는다는 거였습니다. 모두 고급 호텔인데 숙박비가 60불 내외이고 무료 셔틀도 제공되고요. 결국 즉시 호텔로 이동해서 가방 던져두고 시카고 시내에 가서 구경도 하고, 유명한 시카고 딥 디쉬 피자도 먹고, 1인당 총 비용 40불로 시카고 반나절 관광을 했습니다. 왜 2년 전엔 아무도 그런 안내를 해주지 않았을까요? 다행이면서도 뒤늦게 억울한 경우였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게 썼네요. 학회에서 깨달은 바로 따지자면 같은 내용을 전달하면서 읽는 사람 시간을 절약해줘야 훌륭한 글인데 ^^ 아직 글쓰기 능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이번 학회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