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회 소개 및 출장 목적
미국 Pennsylvania 주 State College 시에서 열린 13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Biorheology & 6th International Congress on Clinical Hemorheology에 희경이와 함께 참석하고 왔습니다. 두 학회는 3년마다 함께 열립니다. 2005년에 중국에서 열렸을 때는 저도 혈액을 공부하던 시기라 참석하고 싶었던 학회인데, 그땐 못 가고 이번에 가게 됐네요. 2006년 초까지 혈액 및 혈액 유변학에 대해 공부했던 기반을 가지고, 지금은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 보려고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회가 열린 곳이 예전에 방문했던 피츠버그에서 비교적 가깝고 (차로 3시간 거리) 관련 인물들이 이 학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학회 후에 피츠버그를 방문하여 작성 중인 논문을 최종 마무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회가 끝나고 바로 귀국한 희경이와 달리 전 피츠버그로 이동하여 며칠 더 일하고 왔습니다.

2. 혈액 유변학 > 생체 유변학
두 학회가 합쳐진 것으로 생각하기엔 혈액 유변학의 발표가 훨씬 많았습니다. 혈액이 생체에서 워낙 중요한 유체이긴 하지만, 언뜻 생각하기에 소재가 제한된 혈액보다는 소재가 광범위한 생체 유변학이 더 규모가 더 클 것 같았는데... 그러나 제한된 측정 방식을 가지고 혈액의 점도나 적혈구의 변형 등을 다루는 혈액 유변학은 생체 관련된 다른 학회에서 크게 관심을 못 받는 편입니다. 반면 생체 유변학은 어떤 기술, 기법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다양한, 또 규모가 더 큰 학회에 참석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 학회에 오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돌파구는 신기술이겠죠
첫 행사인 웰컴 리셉션에서 느낀 점은 참석자 중에 노인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노인도 계셨고, 저희같은 학생은 몇 없었어요. 혈액 유변학이 70년대에 임상 적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크게 주목과 인기를 끌었는데, 그 적용이 쉽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관심이 많이 식고, 젊은 피가 많이 수혈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신세현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예전에 공부하면서 읽었던 7, 80년대 논문에서 다룬 몇몇 주제가 2008년에 열린 이 학회에서조차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 펌프에서의 적혈구 파괴 현상도, 8,90년대에 이어 지금도 연구는 국지적으로 꾸준히 되고 있지만 그것이 지금 어떤 결론으로 모아지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분명 기술적으로 그 사이에 큰 발전이 있었을 텐데, 방법론 역시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젊은 연구인력이 투입되면서 신기술이 유입되고... 함께 가야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말라리아에 걸리면 적혈구의 변형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고, 저도 단편적인 지식으로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학회에서 한 말라리아 전문가가 plenary lecture에서 그것을 증명하고 밝히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말라리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변성된 적혈구의 표면을 AFM으로 탐지하여 외형적인 변화를 보고, 그에 따른 적혈구의 변형성 감소 및 부착성 증가를 실험으로 증명하고, 나아가 세포벽에서의 단백질 변성을 추적하는 과정이 차례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번 학회에서 '노인'들이 사용한 실험 방법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말라리아와 적혈구 변형성 감소가 혈액 유변학의 주요한 기본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증명할 기술적 수준을 갖추지 못한 연구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임상학적인 응용의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학회에 의사들이 보이지 않은 것도 눈에 띈 점이었습니다. 혈액의 유변학적인 물성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 혈액을 이해하고 임상에 이용하기 위한 것일 텐데, 생체를 연구하는 이상 임상에서의 응용이 없다면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진 것이 아닌지요. 비자 문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포스터의 2/3가 no-show인 것도 그렇고, 젊은 연구 인력보다는 노인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학회의 흥이 빠진 기분이었습니다. 학회가 끝나갈 무렵에는 으레히 먼저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참석자의 숫자가 줄곤 하지만, 관심을 받지 못한 어떤 세션의 경우 참석자가 해당 세션 발표자 세 명밖에 안 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세 명 다 일본인이어서, 영어로 발표를 하긴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 와중에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좋은 발표 중 하나가 희경이가 아래 언급한 PTM 발표입니다. 발표자 자신이 6, 70년대 전통 혈액 유변학의 대부로 떠올랐던 Shu Chien(슈 시엔)이라는 분인데, 최근에 한동안 논문 출판 없이 잠적했다가 최근에 혈관 내피 세포에 대한 PTM 결과를 들고 수면으로 떠올랐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본인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함인지, 발표장에 사람도 많고 관심도 뜨거웠습니다. 혈액(fluid)이 아닌 단일 세포에 관한 연구였지만,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4. 그런데 유변학회 아닌가?
한 가지 저의 불만은, 학회 이름에 rheology가 똑똑히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유변학적 개념이 사실상 희박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브룩필드 점도계로 혈액의 점도를 불분명하게 측정한 것이 혈액의 유변 물성이라면, 전 할 말이 많네요. 실험뿐 아니라 CFD 연구도 많았지만, 혈액의 점탄성을 고려한 연구는 볼 수 없었습니다. 혈액의 점도 곡선을 예측하려고 G-Newtonian 식을 다듬어 정리한 게 구두 발표로 나올 정도였고, 데보라 수의 개념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을 정도였죠. 학계의 명망 있는 교수님이 shear stess=viscosity x (velocity/diameter) 라는 수식을 plenary lecture 자료에 넣었는데 다들 인정하고 넘어가는 걸 보고 전 아연실색했습니다. 혈액의 점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니 (high shear rate에서 3.8 cP로 알려짐 - Ht는 아마 30%일 겁니다) 굳이 점탄성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 G-Newtonian 을 쓰는 건 말이 될 수도 있지만... 필요가 없어서 안 쓰는 걸까요, 몰라서 안 쓰는 걸까요?
어쨌거나 이 학회에서 생각하는 '유변학'의 개념이 우리와 많이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006년 SOR에 카메네바 교수님 연구실의 박사 과정 학생이 bifurcation 마이크로채널에서 혈액의 plasma skimming을 실험하여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전 혈액을 이용한 그 실험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발표를 본 맥킨리 그룹 학생들이, 마이크로채널에서 실험했는데 무차원 수 하나 계산하지 않고 무슨 결과를 논하냐며 면박을 주는 걸 보고 저도 지레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혈액에 관해서라면 plasma skimming만으로도 충분한 결과일 수 있겠지만, '유변학'적으로는 그게 뭐며, 왜 유변학회에서 발표하냐는 거죠. 그런 느낌이네요.

5. 그럼 우리가 기여할 방법은
그럼 이 학계에 우리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인데... 희경이가 biofilm으로 실험하듯이, 우리가 가진 PTM 기술을 세포 등 더 다양한 생체계에 적용하는 것은 일단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 혈액 유변학에도 기술적으로 우리가 기여할 뭔가가 있겠죠. 하지만 위에서 적었듯이 '임상 적용'이라는 앞길이 트이지 않는 이상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지식을 원하는 MD들에게 유변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포스터 발표 중에, 혈액의 점도를 낮추는 시술을 통해 대안이 없는 당뇨 합병증을 개선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거기엔 복잡한 유변학적 지식을 동원되지 않았고, 연구자도 아마 모두 의사들인 것 같았습니다. 임상에서 필요한 것은 의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가 직접 그런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면 안 될까요.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6. State College = 도시 이름입니다
이번 학회가 열린 곳은 도시 이름이 State College 입니다. 칼리지 타운이라고 하나, 대학 하나로 마을 하나 형성된, 대학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시골 도시예요. Penn State라고 흔히 줄여 부르는 펜실베니아 주립대가 있는 곳입니다. 때맞춰 교내에서 열린 예술 축제(The Festival of Arts)를 관람하도록 학회 일정 중 토요일 오후가 비어 있어서,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조용한 곳에서 잠시 여유를 만끽했습니다. 그곳 유학생 부부를 만나 잠시 동행했는데,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 저는 잠시 쉬러 왔으니 즐거웠지, 그곳에 몇 년을 붙박이로 사신 이분들은 심심해서 환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속으로 들었습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택시 기사가 '가끔 아기곰도 나와서 사람들이랑 놀고 갑니다'라더군요. 사슴이 뛰어다닌다질 않나... 풀밭엔 까만 소를 방목해서 키우고 있고... 음메~

7. 그리고 피츠버그로 이동해서 논문 완성
그렇게 학회를 마치고 나서 차를 얻어 타고 피츠버그로 이동했습니다. 며칠동안 연속해서 집중적으로 미팅을 가지면서 달변이신 두 분 지도 교수님의 일필휘지로 미리 작성해간 논문이 환골탈태- 변신했습니다. 이메일, 전화로도 연락이 안 돼서 2년 반만에 비싼 돈 들여 비행기 타고 날아오게 만드신 그곳 교수님에 대한 원망이 샥 사라졌지요. 호홋.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생면부지의 외국에 1년이나 나가 살 생각을 했던 저는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습니다. 참 겁도 없었지... 이번에 나흘동안 그곳 실험실에 출근해 일하면서, 그렇게 아는 것 하나 없이 먼 외국에서 무작정 날아온 저를 도와주고 챙겨준 그때 그 친구들과 다시 만나 얘기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이번 출장의 큰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좌충우돌 헤매며 무작정 들이대던 제 모습을 떠올리고 초심을 다잡기도 했지요. 당시에 같이 박사 과정을 시작했던 친구들이 모두 졸업을 앞두고 있는 걸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출장하기 전에 계획한 대로 논문 수정이 잘 이루어져서 빡빡한 일정에도 무척 보람 있었습니다.  박사 4년차가 저물어가는 지금에서야 첫 논문을 접수하게 되다니, 뭐가 이리 오래 걸렸나 싶네요.

8. 마무리
석사 기간, 박사 초반 2년까지 했던 연구를 다시 펼쳐 보면서,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조금 드네요. 당시에 몸으로 부딪히며 얻었던 노하우를 아직 가지고 있는 만큼, 그때의 지식을 다시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사실 저한테도 좋은 일일 텐데 말입니다. 좀 더 고민해 볼 노릇입니다.
학생 주제에 전례 없이 긴 출장에 (제 미국 친구들은 이런 저를 보고 '나도 한국 가서 대학원 다닐까봐'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혜택을 받는지 남들은 알아봐 주지요), 생각해 볼 것도 많았고 실질적인 논문의 진척도 있어서 보람이 컸습니다. 잔뜩 피곤하지만 쉬고 싶다기보다는 좀 더 달려야겠다는 기분이 드네요. 출장 보고서의 마무리에 늘 들어가는 말: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