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희경이가 적은 것과 같이 여러 사람들과 미국 鹽湖市에서 SOR에 잘 다녀왔습니다. 아까 아침의 발표 시간에 요점은 대부분 말을 했으니 몇 가지만 더 적을게요.


1. 우선 SOR의 유행이 빨리 바뀐다는 점에 대해...
미국은 연구 기금을 따기 좋은 연구를 좇기 때문에 학회의 유행도 빨리 바뀐다고 합니다. 저는 특히 최근에 가장 관심을 받아온 micro와 bio 분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변화를 많이 체감했습니다. 작년까지 줄을 잇던 PDMS 기반 microfluidics 연구가 싹 걷히고 probe particle을 이용한 microrheology 연구가 새로이 발을 넓히는 등... 작년엔 wormlike 마이셀 관련 발표도 엄청 많았는데 올해는 다섯 편도 채 눈에 안 띄더군요.
하지만 아까 발표 시간에 중건이가 한 얘기처럼 고분자 용액, 멜트, 서스펜전 등의 fundamental 영역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새 유행인 bio, micro는 계속 바뀌지만요. 제 생각엔 "현상" -> "원리"로 가는 transition에서 많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원리로 가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필요한데, 연구 기금을 타기 위해서는 꾸준히 뭔가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저도 '보여주는' 연구에 현혹되어 온 편인데, 조금 달리 보는 눈도 생긴 듯합니다. 특히 박사 과정에서의 연구라면 보여주는 것 이상이 반드시 있어야겠죠.


2. talk / deliver
구두 발표를 할 때 영어 동사로 deliver를 쓴다고 아까 발표 시간에 말씀 드렸죠. 연구 내용이 아무리 좋아 봐야 '배달'하지 못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발표를 하는 목적은 나와 내 성과를 알리자는 것이고, 그러려면 청중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발표를 듣다 보니, 청중을 이해시키지 못 해서 좋은 결과가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늘 익숙하게 보는 flow curve라든가 G', G" 결과라면 간단한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겠지만, 독특한 결과라든가 새로운 방식의 그래프라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 그래프의 내용과 의미를 청중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미국 사람들은 사소한 질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 발표 후에 질문을 많이 받지 못 했다면 그런 점을 점검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설명을 많이 한다고 해서 발표를 잘 하는 것은 또 아니더군요. 보통 청산유수처럼 말을 풀어내는 사람이 발표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쉬운데, 가끔 말은 술술 하면서 내용이 없는 약 장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이번엔 가끔 눈에 띄어서 난감했지요. 어눌하더라도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무리 봐도 한 수 위였습니다.
어쨌든 발표 잘 하기가 참 어렵죠. 아무리 연습을 해도 후들거리는 가슴은 어쩔 수가 없지만, 내 연구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연단에 서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3. being recognized
뱅큇이 끝나고 맥킨리 교수가 술 한 잔 더 하러 가자기에 우리 방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했는데, 시차 때문에 다들 피곤해 해서 못 나왔습니다.
술 먹으면서 이것저것, 주로 연구에 관련된 농담(! 그런 게 존재하긴 합니다)을 주고 받다가 맥킨리 교수가 중건이 발표 얘기를 꺼내더군요. 좋은 내용이었다면서 발표에 나왔던 내용에 대해 다른 학생들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중건이 이름은 기억하지 못 했어요. 맥킨리 교수 본인도 이번에 발표한 LAOS 연구에서 조광수 교수님이 쓰신 논문의 아이디어를 차용했기 때문에 우리 방에서 그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중건이의 발표도 Lee and Ahn's group에서 연구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중건이가 있었다면, 잠깐이라도 둘이 따로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죠?


4. social background
선형 오빠가 발표할 때, 제니 루이스 교수가 '서울대'라고 해도 모르는 눈치더니 프랜시스 교수와 함께 일했다고 하니까 '그러시군요'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얘길 했죠.
제 경우엔 '맥킨리 랩에서 1년 있었습니다'라는 명패가 엄청난 가치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때 제가 사용하던 ARES의 N1 측정 문제 때문에 TA 기술자가 하루 다녀간 적 있었는데, 이번 SOR에서 그 사람이 먼저 절 알아보고 인사하길래 사실 좀 당황했어요. 그게 중건이가 포스터 세션에서 도움 받았다는 Aadil이었습니다. 이건 작은 예고, 그 외에도 문득 문득 느껴져서 좀 무서울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이 명패의 효과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소개 받은 뒤에는 늘 따라오는 질문이 "So what are you doing now, then?"이니까요. 결국엔 저만의 성과를 보여줘야 '그 랩에 있었다던 그때 걔'가 잊혀지지 않겠죠.
어쨌거나, 잘 나가는 랩에서 일해보라고 1년이나 보내주신 게 어떤 은혜인지 다시금 깨닫고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이번에 좀 무리해서 절 보내주시고, 이런 걸 느끼게 해주신 것도요.



출장 보고서는 견문록이 되어야 재미있고, 귀국 발표는 학회장 필기 노트가 되어야 유익한데, 이번에도 좀 뒤죽박죽이네요.
제가 미국에서 지내는 2년 동안 SOR이 3번 열리는 바람에 이번이 4번째 SOR이었는데... 나름대로는 보는 눈도 넓어지고 발표도 좀 더 많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또 다른 얘기 같습니다. 발표로 내 연구를 이해시키는 것만큼이나 출장 후기로 이 감상을 전한다는 것, 너무 어려워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