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그랜드 쉐라톤 호텔
일시: 2022년 10월 9일(일)~13일(목) (현지시간)
2016년 8월 이후 만 6년만에 처음으로 견문록을 작성하게 되었네요. 원래는 귀국 발표를 할 줄 알고 발표를 집중해서 듣느라 미국 내내 기합이 들어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다행히 심리적 부담감이 덜한 견문록으로 대체해주셨습니다. 이런 말은 견문록에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포스터 발표조차 없이 AI, ML 세션이 있다는 이유로 SOR에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이 견문록을 통해 제 학회에서의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다른 분들이 체험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경험들과 느낀점을 잘 드러내기 위해 처음에는 시간 순서대로 줄글로 써보려고 했으나 한두페이지로 끝날 양이 아닌 것 같아서 학회 내용을 제외한 부분은 개조식으로 작성해보았습니다.
시카고에서 인상깊었던 기억
1. 땅이 매우 평평하고 넓다.
2. 건물들이 전부 한국 대형마트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고 그 넓은 땅 한 가운데에 규칙적으로 모아져있다. (시카고 대화재 때문) 그래서 도로명 번호만 가지고도 길을 찾기 쉽다.
3. 횡단보도 보행 신호가 초록불이 아니라 흰불이라 처음엔 헷갈린다.
4. 횡단보도 간 간격이 넓어서 다음 횡단보도 갈 때쯤이면 자동으로 보행신호가 된다.
5. 땅이 보도블럭이 아니라 시멘트로 마감이 되어있고 경사가 거의 없어서 오래, 멀리 걸어도 피로가 없다.
6. 그래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한국보다 훨씬 많이 볼 수 있었다.
7. 거지들도 한국보다 더 많이 보인다.
8. 가격표와 주별 세금이 별도이고(시카고는 매우 비싼 편) 팁 10~20%까지 하면 엄청난 물가를 느낄 수 있다. 하필이면 고달러때 가서 더 비쌌다.
9. 패스트푸드점에 수십 종의 음료수가 전부 나오는 기계가 있다. 콜라만 해도 오리지널, 로우 칼로리, 제로가 있고 각각 다시 다양한 과일 맛이 첨가된 것이 있고 여기에 다시 바닐라가 들어가는 버전을 고를 수도 있다.
10. 100달러짜리 지폐는 대형마트, 기념품점을 제외하면 위폐 문제, 잔돈 문제 때문에 잘 안 받으려해서 돈이 있어도 쓰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어지간하면 50달러나 20달러권 이하로만 가져가는 것이 좋다.
11. 시카고 마라톤 (세계 6대, 미국 3대 마라톤)과 일정이 겹쳐서 당일에 사람들이 엄청 많았고 숙박비가 비쌌다.
12. 밀레니엄 파크와 그 속의 클라우드 게이트, 미시간 호, 몇 개 유명한 빌딩, 스타벅스 리저브(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애플 스토어를 제외하곤 볼게 별로 없고 나머지 박물관, 미술관 등 유명한 곳은 전부 유료이다. 기본 성인 30~40달러 생각해야 한다.
공식 학회 일정은 일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등록하는 곳에 가서 명찰과 초록 제목집, 노트, 리셉션 티켓을 받은 다음 (초록 내용은 어플리케이션 사이트에서 제공되었습니다.) 리셉션 장에 갔습니다. 스케줄 기록 정시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10분 정도 지나니까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학회 측에서 준비한 과일, 햄, 치즈, 빵등의 안주 부스가 너무 협소하고 적어서 안주를 먹기는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리셉션 티켓은 두 장이 절취선으로 붙어있는 형태였는데, 위 티켓에는 ticket이라고 되어있고 아래 티켓에는 keep this라는 글귀와 함께 일련번호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 티켓으로는 바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아래 티켓은 나중에 추첨하는 용도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날에 알게 된 사실이 원래부터 각 두 잔을 마시도록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바 또한 사람 수에 비해서 협소하여 줄 서는 데에 한참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안주와 술을 받아 서서 먹고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시작했는데, 우리 일행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뻘쭘하게 셋이서 서서 이야기만 나눴습니다. 그러던 중 윌리엄이라는 친구(아마도 조지아텍에서 온 분이었는데)가 자기도 혼자왔다며 말을 걸어줘서 안면을 텄습니다. 아시아인들이 그런 적극성이 부족한데, 그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습니다. 그 후에는 홍정숙 교수님이 오셔서 같이 대화를 나누다가 그냥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오전부터 토크 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애초에 AI, ML 세션에 듣기 위해서 SOR을 참여한 것이 컸는데 AI, ML 세션은 첫날 17개가 전부였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여러 사람들의 발표를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차 적응이 아직 덜 된 탓에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커피 브레이크에서 평소에는 잘 안마시는 커피를 몇 컵 씩이나 같이 주는 빵과 함께 흡입했습니다. 17개의 세션의 내용 중의 대부분은 Safa Jamali 교수님 연구실의 PINN으로부터 고안된 RhINN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크게 RhiNN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나 RhiNN을 사용할 때 필요한 구성 방정식 모델을 자동으로 선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나머지 기억나는 연구를 몇 개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인공지능을 통한 계산 가속화에 대한 내용으로 MD 시뮬레이션으로 각 polymer을 직접 모델링하고 이로부터 거시적인 flow를 시뮬레이션 하는데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계산 속도를 10배로 향상 시킬 수 있었습니다. Blood rheology 측면에서 피의 유변물성을 Gaussian regression으로 학습하여, 일반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혈액을 detect하여 정밀 검사 전에 질병을 일찍 detect하는 기법이 있었는데, Gaussian regression 정도는 사실 AI, ML로 보기는 어렵고 입력 변수 또한 두 개 뿐이라서 아직은 초창기 단계일 뿐이었습니다. 또다른 연구로는 viscoelastic fluid의 channel flow 내에 입자를 띄우게 되면 자동으로 입자가 중앙으로 align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입자들의 간격을 random forest 기법으로 분석하여 같은 Wi 값에 대해서 서로 다른 De를 classification하는 내용이었는데, 시공간에 따른 chaotic한 시그널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pipe signal을 ESN으로 분석하여 분류하는 제 연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분도 random forest를 넘어서서 어떤 방식으로 후속 연구를 할지, classification이 아니라 regression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후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오전까지 토크가 지속되었는데, 4개의 plenary lecture와 굉장히 많은 talk를 들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몇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plenary lecture로는 Bingham 메달을 수여받은 Wilson Poon의 psychorheology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분은 스스로를 유변학자보다는 제약사(apothecary)로 소개를 하면서, 제약의 역사와 인간의 감각과 유변학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강연하였습니다. 화장품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유변 물성(yield stress, shear thinning...)이 이미 어느 정도 밝혀졌다는 사실과 유변물성이 나쁜 손 소독제는 사람들이 쓰길 꺼려한다는 연구 내용 등이 흥미로웠습니다. 인상깊은 talk로는 Randy H Ewoldt 교수의 protorheology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protorheology는 본격적인 유변 물성 측전 전의 직관이나 감각을 사용하여 유변 물성을 예측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Ewoldt 교수님은 객석에 앉아있는 본인의 연구실 학생을 통해 먼저 Purell 사의 손소독제를 나눠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해당 손소독제가 가진 유변물성을 같이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고로 그 김에 해당 제품을 손에 발라보았는데 Poon 교수님 말씀처럼 한국에서 발랐던 다른 손소독제와 달리 끈적함이 남거나 하는 것이 거의 없고 마른 후에도 로션을 바른 것같이 부드러운 것이 확실히 감촉이 더 좋았습니다. Ewoldt 교수는 해당 제품 내에 사라지지 않는 거의 일정한 크기의 기포를 언급하면서 이는 yield stress가 존재하는 증거고 기포 크기와 간단한 공식을 yield stress를 예측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곤 그 전까지 있었던 발표에서 볼 수 있는 protorheology나(i.e. yield stress에 따라 vial에 담긴 material을 뒤집었을 때 흘러내리는 양이 다름) 다른 유변학 교수님들이 유튜브 등에 올린 영상에서 볼 수 있는 protorheology (초코 무스의 yield stress) 등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렇게 관객과 즉석으로 토론하면서 진행되는 발표는 처음 봤기 때문에 매우 신선했습니다. 비슷하게 Macosko 교수님의 talk도 인상 깊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insight를 주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유변학 전체를 다루는 새 책을 쓰고 있는데 책 구성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집단지성을 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Macosko 교수님이 가진 고민에 대해 실시간으로 투표를 진행하고 원래 계획은 어땠는지 보여주면서 스피커와 관객들 사이의 자유롭고 interactive하게 talk가 진행되었습니다.
며칠동안 talk를 들으면서 느낀 가장 큰 점은 아시아인에 비해서 나머지 국가 사람들이 발표를 엄청나게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향성은 영어가 모국어인 것도 있겠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분들도 발표를 엄청 잘하는 것을 봐선, 서양인들이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나 연습량의 차이가 이를 좌지우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발표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발표 자료 또한 기가 막힌데, 디자인도 이쁘고 애니메이션도 잘 쓰고 가독성도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원래 잘하는 걸 보지 못하면 잘하기 어려운데 눈이 높아져서 앞으로는 제 발표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talk와 별도로 포스터 세션이 진행되었는데, 간단한 식사와 술이 같이 제공되었습니다. 100개가 넘는 포스터를 전부 둘러보았지만 인공지능은 다섯 개가 체 되지 못했고, 일요일 리셉션에서는 윌리엄을 제외하고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그날은 취기를 빌려 용기를 내 여러 사람들에게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회 전체 일정 중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학회 갈 일이 생기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볼 생각입니다.
목요일 점심에 학회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숙소에서 쉬다가 홍교수님의 소개로 저녁에 권영돈 교수님과 이헌상 교수님, 그리고 그 밑에 제자 한 분과 식사와 술을 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분들께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재밌는 이야기가, 유변학이라는 학문이 워낙 범위가 넓고 어렵다보니, 직접 연구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라면 교수님들조차 남들의 연구는 절반 정도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연구를 계속 하면서 주워 들은 게 많아져서 점점 더 이해하는 양이 늘어나기는 하나, 그 폭이 크게 커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번 학회 발표를 들으면서 6개월차때 한중일 학회 갔을 때보다는 훨씬 많이 이해하지만, 아직 이해가 안되는 것이 훨씬 많아서 좌절했던 입장에서 이는 참으로 안심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주신 또 다른 메세지는 결국 교수님들과 우리가 식사를 하는 것처럼, 인생에서 사람 간의 네트워킹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특히 또래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둬야 마흔 넘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교수님들과 친해지기보다 교수님 제자분과 친해지라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얼굴은 기억이 나고 이름은 생각이 안나는데 다음 학회 때 마주치면 그래도 반갑게 인사할 생각입니다.
교수님들과의 식사, 술자리를 마치고 목요일 밤에 숙소에 돌아와서 잠시 잔 후에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상으로 미국에서 겪은 제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바를 요약해서 전달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아래와 같은 제 결론을 같이 공감하실 수 있었으면 좋겟습니다.
1. 외국 사람들은 발표나 발표 자료 준비를 참 잘한다.
2. 유변학에서 남의 발표를 알아듣기 어려운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3. 사람 간의 네트워킹이 매우 중요하다. 아시아인들이 대체로 많이 shy한데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